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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 역사 > 시조 최치원 > 표로 보는 일대기

西 紀
檀 紀

新 羅

渤 海

나이

事 蹟

857
(丁丑)
3190

문성왕
19년
(文聖王)

 

 

(세)
1

 선생은 신라의 서울 사량부(沙梁部)에서 탄생하셨으니, 그 아버지의 이름은 견일(肩逸)이다.
 선생의 성은 최씨요, 이름은 치원이며,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라 하고, 호(號)도 역시 고운(孤雲)이라 한다.
 

헌안왕
1년
(憲安王)

이진
(彛震)
28년
함화
(咸和)

선종
(宣宗)
대중
(大中)
11년

 

 최씨는 대개 진한(辰韓)의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을 기원으로 하여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 사성(賜姓)에 의하여 최씨의 성이 비롯하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성품이 정민(精敏)하며 학문을 좋아하는 재사(才士)였다.

857~
867
3191~
3200

헌안왕
2년
(憲安王)
경문왕
7년
(景文王)

근황
1~10

선종
(宣宗)
12년
의종
함통
(毅宗
咸通)
1년

2 ~
11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精敏好學(정민호학)」하신 시절
 

경문왕
8년
(景文王)

근황
11년

선종
(宣宗)
12년
의종
함통
(毅宗
咸通)
1년

12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자 만리붕정(萬里鵬程)에 오를때, 그 아버지께서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을 공부하여 과거를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니 아무쪼록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 아비의 소원하는바를 잊지 말고 꼭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간곡한 훈계를 받았다.
  선생은 아버지와 애절한 이별을 나누고 그리운 고국산천을 떠나 보호자도 없이 단신으로 상선(商船)에 몸을 싣고 수륙만리(水陸萬里) 먼 길을 떠나면서 오직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만을 가슴에 깊이 새기어 오매불망(寤寐不忘)하였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에 유학하는 유학생 대부분은 소위 「숙위학생(宿衛學生)」〔일종의 질자(質子)로서의 유학생〕이라는 명의로 파견되었다. 그들의 숙식과 의복은 당나라의 홍로시〔외무부와 같은 것〕에서 지급하고 구서비(購書費)는 본국에서 지출하였던 것 이다.
  이밖에 사적으로 도당유학(渡唐留學)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 수는 많지 못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바, 오직 선생은 사비로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다.

869~
873
(己丑)
3202~
3206

경문왕
(景文王)
9~13

근황
12
경왕
(景王)
4년

함통
(毅宗
咸通)
10~
14

 13~     17

  당나라에서 현사(賢師)를 찾아 공부하신 시절

874
(甲午)
3207


14


5

희종
건부
(僖宗
乾符)
1년

18

  선생은 이속타국(異俗他國)에 고단(孤單)한 생활이었으나 천품이 뛰어나고 재질이 비범하여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널리 현사(賢師)를 찾아서 수학하며 오직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않고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으로 유학한지 6년만에 (甲午9월)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纘)의 주시(主試)로 된 제과(制科)에 응시 하여 단번에 급제하였으니, 그 아버지께서 「10년 공부하여 과거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한데 비하여 오히려 4년을 단축한 짧은 기간에 훌륭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때 느껴지는 심정을 읊고 사물에 빙자하여 책을 만든 부(賦)와 시가 상자에 가득하였으나 미간(未刊)한 채로 모두 버려졌다고 한다.

875
(乙未)
3208

헌강왕
1년
(憲康王)

경왕
(景王)
6년

희종
건부
(僖宗
乾符)
2년

19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량하며 저술한 부 5수(賦五首) · 시 100수 · 잡시부(雜詩賦) 30수를 모아 3편을 이루었다. 귀국후(歸國後) 886년 정월에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린 글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876
(丙申)
3209


2


7


3

20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에 임명되었으니, 현위(縣尉)는 지방행정관인 바, 약관의 외국인으로 중국에서 이례적인 우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바쁜 공무에도 촌음(寸陰)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며, 공사 바쁜중에 지은 글이 모두 5권이 되었으니, 명작의 하나인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중산(中山)은 그 지방의 이름이요, 복궤(覆?)는 산을 쌓는데 마지막 한 산태미의 흙까지 노력해야 된다는 뜻〕인데 이 책은 지금 전함이 없다.
  쌍녀분(雙女墳)의 기담(奇談)도 이때의 일이다. 
선생의 문재는 날로 세상 사람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관리로서의 능력도 비범하였다.

877
(丁酉)
3210


3


8


4

21

  이해 겨울에 선생은 표수현위(漂水縣尉)를 사직하였다.

878
(戊戌)
3211


4


9


5

22

  선생이 고변(高騈)에게 올린「장계(長啓)」속에 「전년동 파리말위 망응굉사 계결거산 잠위은퇴 학기지해 갱자탁마 구연녹봉무여 서량부제(前年冬 罷離末尉 望應宏詞 計決居山 暫爲隱退 學期至海 更自琢磨 俱緣祿俸無餘 書糧不濟)...〔지난해 겨울에 말위(末尉)를 그만두고 굉사과(宏詞科)〔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로서, 관리선발에 있어 문장 삼편을 고사하던 시험과목〕응시할 것을 바라, 산에 은거하려는 결심으로 잠깐 은퇴하여 학문이 바다에 이르기를 기약하고 다시 탁마(琢磨)하였더니 녹봉(祿俸)이 남음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라서...〕라고 한 문구를 보면, 아마 21세 되는 겨울에 ?(율)水(수)현위(縣尉)를 그만 두고,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서 학업을 탁마()하신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또 「장계(長啓)」속에 「太尉相公(태위상공) 逈垂
燐(형수장린) 便署職秩(편서직질) 跡趨鄭驛(적추정역) (태위상공이 멀리 어여쁘게 추장(推)해 주어 직질(職秩)에 넣어서 자취는 정역(鄭驛)에 나아가고)라고 한 문구를 보면, 이해에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옮기어 정장(鄭莊)의 정무를 주관한 것 같다.

879
(己亥)
3212

헌강왕
(憲康王)
“ 5년

경왕
(景王)
10년

희종
건부
(僖宗
乾符)
6년

23

  황소(黃巢)의 발란군이 장안(서울)을 함락시키고 그 세력이 크게 떨쳤으므로 당 나라 조정에세는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고변(高騈)을 제도행영(諸道行營) 병마도통(兵馬都統)〔관군(官軍)의총지휘자〕으로 임명하여 반적(叛賊)을 토벌케 했는데, 고변(高騈)은 평소 고운 선생의 인격과 문재를 추앙해 마지않던 사람이었으므로, 즉시 선생을 모시어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表) · 장(狀) · 서(書) · 계(啓) · 격문(檄文) 등이 모두 선생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이 고변(高騈)에게 올린 「장계(長啓)」속에「去年中夏(거년중하) 伏遇出師(복우출사) 忽賜招呼(홀사초호)...某(모) 自江外一上(자강외일상) 縣尉便授內殿憲秩(현위편수내전헌질) 于兼章拔(우겸장발)... 其如都統巡官(기여도통순관) 須選人材稱職(수선인재칭직) (작년 여름에 출사하게 되었을 적에 갑자기 불러 주시고.... 나는 강외에서 현위에 올랐다가 곧 내전의 헌질을 받고 또 장발을 겸하고...그 도통순관에는 반드시 인재를 뽑아야 책임을 감당합니다)라고 사양한 문구를 보면 이 해에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중직으로 승차되고 겸하여 포장(
章)으로 비어대(緋魚袋)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880
(庚子)
3213

헌강왕
(憲康王)
6년

경왕
(景王)
11년

희종
광명
(僖宗
廣明)
1년

24

  이해 7월 8일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는데 이 한편의 글은 반적(叛賊) 황소(黃巢)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글 중에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뿐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 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 포악무지(暴惡無知)했던 황소(黃巢)도 놀라 혼비백산하여 저도 모르게 상(床)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서 선생의 문명이 천하에 떨쳤다.

881
(辛丑)
3214


7


12

중화
(中和)
1년

25

  계속 군막(軍幕)에 종사하며 서역(書役)을 담당하다.

882
(壬寅)
3215


8


13


2

26

  당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것은 붉은 금빛으로 꾸민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린 주머니요, 그 속에는 성명을 적은 표신이 있어 대궐도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외국 청년에게는 더 할수 없는 영광이므로 시를 지어 감사를 표한다.〔문집상권(文集上卷)20면 동상비문(銅像碑文)참조〕선생이 찬술한 「상재국척 대신등 봉위헌강왕 결화엄경사 원문(上宰國戚 大臣等 奉爲獻康王 結華嚴經社願文)」 끝에 중화 2년 찬(撰)이라 하였으니, 선생이 귀국전 당나라에서 지은 글이다.
  과연 당나라에서 이 글을 지어 본국에 보낸 것인지, 연대 기록이 착오인지? 알 수가 없다.

883
(癸卯)
3216

헌강왕
(憲康王)
9년

경왕
(景王)
14년

중화
(中和)
3년

27

  선생이 지은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서문에 의하면「회남(淮南)에 종직하여 고시중(高侍中) 고변(高騈)」의 필현(筆硯)의 역을 도맡게 되자, 그 몰려드는 군서등을 힘껏 담당하여 4년간에 마음 써 이룬것이 무려 만 여수가 되었으나 도태(淘汰)를 거듭하고 보니 11분의 1~2도 되지 못한 것을 정선하여 마침내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었고 융막(戎幕)에서 우식(寓食)하며 소위 선어시 죽어시(饍於是 粥於是)한 까닭에 문득 필경이란 제목을 붙였다」라고 하였으니 23세 되는 해 여름부터 4년간 종군한 것으로 보아 27세 되는 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 끝에 몇 수는 귀국전후(歸國前後)에 지은 글이 실려 있다.

884
(甲辰)
3217

“ 10

“ 15


4

28

  10월에 당나라 희종황제(僖宗皇帝)는 선생이 고국에 돌아갈 뜻이 간절하심을 짐작하고, 특히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띠게 해 주었고, 고변(高騈)은 2백관이나 되는 돈과 행장을 갖추어 주었으며, 또 당나라 문사(文士)들로 고운(顧雲) · 양첨(楊瞻) · 오만(吳巒) 등은 석별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고운(顧雲)은 같은 해에 급제하여 친교가 가장 두터운 친구요, 특히 선생을 고변(高騈)에게 추천한 사람으로서, 아래와 같은 시를 주었다.
 「계림(鷄林)나라 삼신산(三神山) 맑은 정기로 태어난 기이한 사람, 12세에 배타고 바다 건너와 글로써 중원천지 흔들었고 18세에 과거마당 들어가 단번에 급제 한 장 따낸 이라네」 <문집 상권 해제 참조> 선생은 본국사신 김인규와 영접차 집소식을 전해왔던 4촌 아우 서원(棲遠)과 함께 많은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회남(淮南)을 떠나 금의환향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고변(高騈)은 약주머니〔약을 뱃머리에 달면 풍랑이 두렵지 않는것〕를 주며 평온한 뱃 길의 무사를 축원(祝願)하였지만 풍랑은 사람의 염원과는 같지 않아서 유산(乳山)에 이르러 할 수 없이 배를 멈추고 10여일간 바람이 개기를 기다리다가 겨울철이 당도하여, 할 수 없이 곡포(曲浦)에 정박하여 남은 겨울이 지난 후 봄날을 기다리는 동안 찬산신령에게 제를 지내기도 했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 상태위별지(上太尉別紙)·제찬산신문(祭찬山神文)參照〕

885
(乙巳)
3218

헌강왕
(憲康王)
11년

경왕
(景王)
16년

광계
(光啓)
1년

29

  이 해 3월에 선생이 그립던 고국에 돌아왔는데, 헌강왕은 시독(侍讀)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의 요직을 주었고, 선생도 즐거이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원친초위어의문(遠親稍尉於倚門)(멀리 계신 어버이는 문에서 기다리는 걱정이 조금 위로될 것이요)<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 · 모이영봉사 즉수영친(某已榮奉使 則遂寧親)(아무는 영광스럽게 사신으로서 어버이를 뵈옵게되었다.) <사사제서원전장(謝賜弟棲遠錢狀)> 이상의 글로보아 오래동안 부친께 봉양을 못한 선생으로서는 노친께 지극한 효도를 하셨으리라고 믿어지는 바다.
  이 해에 헌강왕의 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을 찬술(撰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완성된 것은 진성 여왕대(眞聖女王代)에 이르러서였다. 즉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왕실이나 귀족들이 사원을 창건하고 있는 한 예(例)이다.

886
(丙午)
3219

헌강왕
12년
(憲康王)
정강왕
1년
(定康王)

경왕
(景王)
17년

광계
(光啓)
2년

30

  이 해 정월에 선생이 당나라에서 지었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중산복궤집(中山覆櫃集) 및 시부 3권을 합하여 헌강왕에게 올리다. 그중 계원필경(桂苑筆耕) 만이 전해오는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저작이요 높이 평가받는 책이다. 선생이 「왕비김씨 김대성(金大成)의 3세 손녀) 위고 수석가 여래상번 찬병서(爲考 繡釋迦 如來像幡 讚竝序)」를짓다. 이글 끝에 중화(中和) 6년 병오라고 하였는데, 중화에는 6년이 없으므로 병오년은 곧 광계(光啓) 2년이다.

887
(丁未)
3220

진성
여왕
(眞聖
女王)
1년


18


3

31

  이해 정월 7일에 「대화엄종 불국사비로차나(진흥왕소주불) 문수보현상 찬병서(大華嚴宗 佛國寺毘盧遮那(眞興王所鑄佛) 文殊普賢像 讚竝序)」를 짓다.
  동연월일(同年月日) 에「대화엄종 불국사 아미타불상(진흥왕소주불)찬병서(大華嚴宗 佛國寺阿彌陀佛像(眞興王所鑄佛)讚竝序)」를 짓다.
또 이해 11월에 지은「왕비김씨 위선고 급망형 추복시곡원문(王妃金氏 爲先考 及亡兄 追福施穀願文)」끝에 중화 정미(丁未)라고 하였는데, 중화에는 정미가 없으므로 광계 3년이 곧 정미가 된다.
  그리고 그 밑에 부성태수 모 찬(富城太守 某 撰)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선생이 부성태수(富城太守)로 가기 이전이라 아마 후인(後人)의 기록착오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선생이 왕명에 의하여 지은 비명「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가 건립되다.
 

진성여왕
(眞聖
女王)
2년

경왕
(景王)
19년

소종
문덕
(昭宗
文德)
1년

32

  지난 해에 헌강왕이 돌아간 후 아우 정강왕(定康王)이 즉위했으나 1년만에 그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여제(女帝)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는 무자(無子)한 정강왕이 돌아갈 때에 선덕 · 진덕 두 여왕의 고사(古事)에 따라 특히 그를 세우라는 유조(遺詔)가 있었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왕은 내행(內行)이 부정(不淨)하여 여러명의 연소미장부(年少美丈夫)를 불려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요직(要職)을 주어 국정을 맡기니 정치는 탁란(濁亂)하여 회뢰(賄賂)가 공행하고 상벌과 임면이 공정치 못하며 기강이 해이하는등 여주(女主)와 간신에 따른 폐해(弊害)가 실로 컸었다. 이로써 식자간에는 시정을 의평(議評)하여 익명으로 벽서(壁書)를 붙인자도 있었다. 때마침 명사 거인이 누구의 밀고(密告)에 의하여 애매하게 처형될 지음, 별안간 운무(雲霧)가 대작하며 뇌정벽력(雷霆霹靂)에 우박까지 쏟아짐으로 왕은 이에 놀라서 그만 거인을 놓아 보냈다.

889
(己酉)
3222

진성
여왕
(眞聖
女王)
3년

경왕
(景王)
20년

소종
용기
(昭宗
龍紀)
1년

33

  1년이 지난 후 중앙의 흐린 정치는 곧 지방행정에도 적지 않은 여향을 끼쳤을 것이며 일반 민심의 동요 역시 추상(追想)되는 바이다.
때마침 흉년으로 기근(飢饉)이 일어나자 국내제주현(國內濟州縣)에서는 공부(貢賦)를 수송치 아니하였다.
  이로인하여 국고가 비고 국용(國用)이 궁핍(窮乏)하여지매 왕은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租稅)를 독촉하였다. 중앙의 위령(威令)은 이미 땅에 떨어지고 병제(兵制)의 퇴폐(頹廢) · 토호(土豪)의 발호(跋扈), 국도(國都)의 편재는 지방의 동란을 유치함에 더욱 형편이 좋았다. 그리하여 국내 곳곳에서 납세를 거부하고 전후 난(亂)을 일으키는 자벌떼와 같았으니 이때는 진성여왕 즉위 3년이었다.
  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진언도 하였지만 그것이 시행되지 못함은 물론이요, 높은 학문과 포부(抱負)를 가졌기 때문에 시기 질투가 시작되어 조정의 인물들은 누구나 모두 다 선생의 일거일정(一擧一靜)을 눈여겨 보며 방해를 일삼기 때문에 가슴에 품었던 이상과 포부는 사라져 갔고 나라를 위한 모든 경륜조차 하나도 펴보지 못 하고 말았던 것이다.

890
(庚戌)
3223

진성
여왕
(眞聖
女王)
4년

경왕
(景王)
21년

소종
대순
(昭宗
大順)
1년

34

  선생은 시세의 불우함을 어찌할 수 없어 결연히 내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을 자청하였으나 첫 번째로 나가게 된것이 태산군(太山郡)〔지금의 전북 태인〕 태수(太守)였다. 태수가 되어 지방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 힘쓰기도 했으나 선생으로는 쇠망해가는 국운과 함께 한탄스런 나날을 보낸 것이다.
  이 때 왕명으로 낭혜화상비문(朗慧和尙碑文)을 찬술하다.

891
(辛亥)
3224


5


22

"
2

35

  이때는 벌써 북원(北原) 원주에서 일어난 양길(梁吉)이 그 부하 궁예로 하여금 북원동부락(北原東部落)과 명주관내(溟洲管內)의 10여군현을 공취하였다.

892
(壬子)
3225


6
후백제
(後百濟)
견훤
(甄萱)
1년


23

소종
경복
(昭宗
景福)
1년

36

  이 해에는 비장(裨將) 견훤(甄萱)이 완산(完山) 전주에서 起兵기병)하여 완산 일대를 점거하고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동남부군현(東南部郡縣)들이 투항귀속(投降歸屬)하니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893
(癸丑)
3226


7
견훤
(甄萱)
2


24


2

37

  이 해 병부시랑(兵符侍郞)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는 항해 도중 풍랑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선생은 부성군(富城郡)(현; 충남 서산) 태수로 재임중이었는데, 조정에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아 당나라에 파견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흉년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남으로써 길이 막혀 부득이 중지하였다.
  그 후 다시 당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일이 있다고 하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천령군(天靈郡) 경남함양(慶南咸陽) 태수를 역임한 연대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가기 전으로 보아 선생의 나이 35~6세 때라고 볼 수 있다.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비문은 헌강왕의 유명(遺命)으로 고운선생이 찬술 한 것인데, 완성된 것은 바로 이해(893)다. 그러나 그 비가 건립된 것은 경명왕 8년(경애왕 원년) (924년)이다.

894
(甲寅)
3227

진성여왕
(眞聖
女王)
8년
견훤
(甄萱)
3년

경왕
(景王)
25년

소종
건영
(昭宗
乾寧)
1년

38

  선생은 비록 나라의 혼란속에서 버림받은 사람처럼 되었건만은 그같이 어지럽기 때문에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더욱 버리지 못해서 이해 2월에 정치의 급선무 십여조를 올린 바, 왕은 이를 기꺼히 받아들이고, 신라의 작위중(爵位中) 제 六위에 가는 아찬(阿) 벼슬을 내려주니 그것은 진골(眞骨)이외의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무책은 실행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알 수 있을 그 귀중한 글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895(乙卯) ~
897(丁巳)
3228~
3230

진성여왕
(眞聖
女王)
9년
견훤
(甄萱)
4년
?6년
효공왕
1년
(孝恭王)

경왕
(景王)
25년
~
28년


2
소종
건녕
(昭宗
乾寧)
4년

39~
  41

  이 해 7월에 해인사 「묘길상탑기(妙吉祥塔記)」를 짓다. 동란은 점점 확대되어 전국에 미쳤다. 기회에 승한 반란자 중에는 상주에 웅거한 원종(元宗) · 애노(哀奴) 둥과 북원에서 일어난 양길(梁吉)의 무리,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 · 완산(完山)<전주>의 견훤(甄萱), 양길부하에서 일어난 궁예의 무리가 가장 완강하여 군웅할거의 상태를 이루니 중앙의 무력한 정령(政令)으로는 도저히 이들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진성여왕은 재위 11년에 부득이 인책선양(引責禪讓) 잘못된 책임을 지고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일〕되고 6월에 헌강왕의 아들이요 여와의 조카인 효공왕(孝恭王)이 그뒤를 이으셨다. 동유록(東儒錄)에 의하면 선생은 896년에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 되고, 동국문묘(東國文廟) 십팔현 연보(十八賢 年譜)에 의하면 898년까지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898
~
899
(己未)
(戊午)
3221
~
3232


2~3
견훤
(甄萱)
7~8


29
    ~       30년 

광화
(光化)
1년
~2

42~
 43

  동국문묘(東國文廟) 십팔현 연보(十八賢 年譜)에는 이해 11월에 아찬(阿瓚) 벼슬을 면직하였다고 했는데 동유록(東儒錄)에서 선생이 2년전(896)에 가야산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이 해 정월에 「신라가야산 해인사결계장기 (新羅伽倻山 海印寺結界場記)」를 짓다.
  혹자는 선생이 불교에 너무 가까이 했다고 평한다. 그러나 유가의 척불(斥佛)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창도(唱道)한 바로 송나라 정주제현(程朱諸賢)에 이르러 그 기운이 차차 준절(峻截)하여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근세에 이르러 그 기운이 왕성하여 더러는 도에 지나친 일도 있었으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유자의 척불(斥佛)은 커녕 거국이 거의 불교 일색으로 되어서 불소 등은 국가관례 또는 제도로 또는 왕명으로 어느 문신이나 다하였으며, 더구나 선생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한유(韓愈) 이외에 유가의 척불 기운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그 당시 세대상황에 맞춰 불교에 관(關)한 찬(讚) · 기(記) · 원문(願文)등을 쓰신 것으로 생각된다.

900
(庚申)
3233

효공왕
4년
(孝恭王)
견훤
(甄萱)
9년

경왕
(景王)
31년

광화
(光化)
3년

44

  이 해에 견훤(甄萱)은 완산에 도읍하여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자칭하고, 10월에 궁예는 왕건으로 국원 등을 평정케 하였다.
선생은 이같이 혼란하니 학문이 쓸곳 없고 인심조차 갈수록 험악하므로 마침내 벼슬을 던져 버리고 막대를 벗삼아 방랑의 길을 떠났다.
                                                            〔문집 상권 동상비문 참조)
  선생이 벼슬을 내어 놓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이상과 같이 40세 혹은 42세나 44세로 되어 있다.
선  생은 이해 12월 그믐날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海印寺 善安住院 壁記)」를 짓다.

1020
(庚申)
3353

고려
(高麗)
현종
(顯宗)
11년

 

송(宋)
진종
천희
(眞宗
天禧)
4년

 

  고려 헌종 11년 8월 정해에 내사령(內史令)을 추증(追贈)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다.

1023
(癸亥)
3356


14

 

인종
천성
(仁宗
天聖)
원년

 

  고려 현정 11년 2월 병오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다.

1074
(甲寅)
3407

문종
(文宗)
28년

 

신종
희령
(神宗
熙寧)
7년

 

고려 문종 28년 9월 병신에 五대 손 선지(善之)를 도염서사(都染署史)를 삼다.

<참고>

위 표로 보는 일대기는 최준옥 종친님의 저서 자료를 인용하여 게재한 것입니다.